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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에 꿈을 전하는 마담 리 몬드 레브(Madam Lee Monde Reve)이주영 회장아름다움에 대한 꿈을 이뤄 주고파 91世에 ‘꿈과 도전’을 말하다

꿈을 꾸는 이는 아름답다고 한다. 이주영 회장이 평생 걸어온 길에는 꿈을 향한 도전의 철학이 녹아 있다. 91세의 나이로 처도불이(處道不貳)를 다시 깨우쳐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게는 시간도 빗겨나간 열정이 깃들어 있다. 질곡의 삶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마담 리 몬드 레브’를 통해 화장품 산업의 관행에 도전하고 있는 이 회장을 만나 삶의 여로와 새로운 도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간도 꺾지 못한 열정과 꿈을 세상과 나누다
올해로 91세를 맞이한 이주영 회장은 여전히 자신의 꿈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 있다. 1929년에 태어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격변의 세월을 보냈지만 역경도 그의 꿈을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여성들에게 진정한 아름다움과 꿈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는 그는 67세의 나이로 사바비안을 설립한데 이어 지난 2013년 ‘마담 리 몬드 레브’를 통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화장품 대기업에서 최고의 조건으로 스카웃 될 정도로 영업 분야에서 인정받았던 그는 비싼 화장품들이 오히려 피부에 독이 되는 악순환을 목도하고 직접 개발에 뛰어들었다. “자식들을 독립시킨 후 찾아온 적막과 고독 속에서 찾은 길이었다”고 회상한 그는 “모든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화장품을 만들어 보자는 단순한 마음에서 였다”고 말했다. 은퇴 후 휴식을 즐기게 마련인 나이에 화장품 연구에 침잠한 그는 1996년 미용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열정을 쏟아 부었다. 화장품 개발 연구실에 들어가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애썼던 이 회장의 원칙은 간단했다. ‘정말 피부에 필요한 것만 남기자’는 것과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제품을 선 보이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화학성분들을 배제하게 되었으며 복잡하게 나뉜 여러 용도들을 통합한 제품을 출시했다.


“화장을 안 해도 맑은 피부로 당당히 외출할 수 있는 시대를 열고 싶다”는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알면 미인이 된다’는 제목의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많은 여성들에게 피부와 화장품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데 기여하고 있다.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사바비안은 한국과 미국으로 지사를 확장하며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는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모든 권리 이전을 마친 채 귀국했다. 삶에 쉼표를 찍는 듯이 보였지만 이 회장은 다시 도전장을 냈다. ‘마담 리 몬드 레브(Madam Lee Monde Reve)’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 회장의 호칭이었던 ‘마담 리’에 ‘꿈’을 더한 것이다. 심볼마크인 나비는 이 회장이 직접 디자인했다. 아름다운 피부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비처럼 날아 찾아가는 마음을 담았다는 ‘마담 리 몬드 레브’는 미네랄을 주원료로 하여 합리적인 가격을 표방하고 있다. “진짜 좋은 화장품이 비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모든 여성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는 이 회장은 ‘마담 리 몬드 레브’를 통해 화장품 산업에 변화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근현대사의 격변을 함께한 희노애락과 삶의 여정
이 회장의 삶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의 조부는 30년 동안 도지사직을 지낸 명망 높은 집안이었으나 독립 운동가였던 이 회장의 외삼촌과 함께 활동하던 그의 부친이 헌병대에 주요 관리 대상에 들면서 부침이 이어졌다. 결국 주변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부친은 그곳에서 생활 터전을 일구면서 가족들을 교토로 이주시켰다. 당시 이 회장은 6살로 소학교 1학년부터 일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학교에 입학했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입학 첫날부터 조선 옷과 신발이라고 놀림당해 다음날 양장을 입고 갔더니 이번에는 너무 차려 입었다며 괴롭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 집은 부유해서 매일 양장을 입어도 되니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다행히 일본 내에 지인들이 많았던 부친은 군수공장을 맡게 되었고 그곳에서 징용을 피한 조선 유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접했고 바둑과 장기도 곧잘 두었던 탓에 일본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 식량 배급 속에서도 몇 백명의 사람들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국을 향한 그리움이 항상 남아 있었다. 조국어로 공부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부친을 설득한 끝에 홀로 돌아와 친척집에 의탁하며 경북대학교 부속사범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경북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해방을 맞이한 해 11월에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강경하게 부친을 설득한 데는 동화 같은 일화가 숨어있다. 강점기 시절 기마부대장이 종종 부친을 찾아왔는데 그 말을 관리하던 젊은 병사에게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늘 융숭한 대접을 해준 이 회장의 집안에 고마움을 표하며 그는 해방 직후 조국의 본가 주소를 알려주고 떠났다. 


이 회장은 주소를 가지고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경북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하숙집 위치를 알려주셔서 재회할 수 있었다”면서 “이 험한 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조국에서 공부할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었다”고 덧붙였다. 어려운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학교생활을 이어간 이 회장은 쾌활한 성격 덕분에 금방 많은 학우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었다. 남녀공학이었던 탓에 연애편지도 많이 받았지만 그럴 때 마다 곧잘 미래의 부군이 되었던 이에게 가져가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고 한다. 둘은 곧 미래를 약속한 사이로 발전했지만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만 같던 삶에 한국전쟁이라는 위기가 닥쳤다.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릴 수 없었기에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교토에 정착할 수 있었다. 

행복한 생활이 이어지는 듯 했지만 슬픔이 그를 찾아왔다. 4명의 아들을 남기고 이 회장이 37살이 되던 해에 부군이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 하나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잇달아 찾아온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사랑하는 이가 남긴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왜놈들에게 머리 숙이지 않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아들들을 잘 키우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착실하게 성장한 아들들을 두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식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일들이 많아 동경대학에 입학하면 일본인 며느리를 볼까 걱정되었다”면서 “고심 끝에 자식들에게 한국 대학에 입학해 한국인과 결혼하길 바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결국 두 아들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한 아들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세 아들 모두 피부과를 전공해 두 명은 일본 10위 안에 드는 피부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 아들은 미국 뉴욕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일본에서 살아온 이 회장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나라가 강해야 밖에서 국민들이 존중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 그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강경한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쓴 소리를 아끼지 않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효고현 본부 대한재일부인회 대표로 참석한 토론회에서도 일본 정부의 차별적인 태도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많은 세금을 내고 있지만 선거권이나 연금혜택은 물론 학생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책정되는 학생할인에까지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국가 정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여전히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는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한다”면서 “한국 정부도 물러서지 말고 고통 받은 국민들의 아픔을 돌아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그는 재일국민들이 조국을 생각하며 모은 기금과 헌금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현실도 지적했다. “IMF 금융 위기 당시 재일교포들이 거금을 모아 전달했지만 언론에서는 이를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면서 “어디에 있더라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진심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67세에 뛰어든 아름다운 꿈과 도전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이 회장은 화장품 영업에 뛰어들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고가 되고야마는 성격을 십분 발휘하며 일본 전국에서 화장품 영업부문 1위를 세 번이나 달성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 받으며 스카웃되었다. 영업사원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7년 동안 근무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제약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뛰어난 실적을 올려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본사 정직원으로 채용하지 못한다는 말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거액의 임금 상승 제안을 뿌리치고 퇴사해 직접 화장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 회장이 67살의 나이로 설립한 사바비안이었다. 
설립 5년 만에 한국 지사 사바비안 코리아를 설립한데 이어 청담동 본사를 중심으로 전국 60여 곳의 대리점이 문을 열게 되었으며 미국 지사도 성공적으로 런칭했다. 우수한 제품력에 합리적 가격까지 더해지면서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다. 제품에 대한 자신감은 사바비안을 사용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피부미인대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등에게는 1년 동안 사용 가능한 사바비안 제품과 하와이 여행이 상품으로 주어졌다. 한국에 런칭한지 20여년이 되어가는 동안 사바비안을 통해 이 회장이 쌓은 인연도 깊다. 이제는 사바비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해 명예회장으로 물러났지만 이 회장이 67세에 시작한 도전의 길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꿈을 전하고 있다. 
 

화장품 산업의 관행에 도전한 ‘마담 리 몬드 레브’
이 회장은 ‘기능성 화장품’이라는 개념은 대기업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피부는 기본적으로 땀과 노폐물을 배출하는 배설기관이지 흡수하는 기능은 없다”면서 “아무리 좋은 성분을 발라도 피부가 좋아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자극 없는 세안제를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리한 기능을 위해 화학성분들이 대거 함유되다 보니 오히려 피부에 자극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는 “화장품은 여성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산업인데 피부를 해쳐서 되겠는가”하고 반문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신제품 출시와 과도한 마케팅 비용이 관행처럼 정착된 산업의 흐름도 함께 지적했다. “인간의 피부 생리는 컴퓨터보다 정확하게 유해 성분을 가려내는데 대기업들이 남성용은 물론 어린아이들을 위한 화장품까지 따로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철학을 담아 새롭게 도전한 것이 바로 2013년 런칭한 ‘마담 리 몬드 레브’이다. 오일과 계면 활성제를 전면 배제하고 제품도 에센스와 크림, 세안제, 선크림 등 총 6종으로 최소화시켰다. 기존 화장품 산업의 흐름에 맞추어 라인을 세분화했던 사바비안보다 더 파격적인 방식이다. 선크림의 경우 화학성분을 최소화하고 누에고치 가루를 활용해 자외선을 반사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중 이 회장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2년 동안 브랜드 출시를 곁에서 도왔던 이가 상표와 제품을 모두 가로챈 것이다. 심지어 대면한 적조차 없는 이 회장의 아들을 언급하며 공동 개발했다고 거짓홍보를 하기도 했다. 
현재 이 회장은 브랜드를 되찾기 위해 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올해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마담 리 몬드 레브’에 대한 홍보와 판매를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인터넷 쇼핑몰과 연계한 방식으로 판매할 예정이며 향후 홈쇼핑으로도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향후 계획을 말하는 이 회장에게는 세월의 흔적조차 무색해진다. 91세의 나이로 꿈과 도전을 말하는 이 회장의 얼굴에서는 꿈을 꾸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이동현 기자  jineu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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