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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별세 -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낸 불굴의 신념가여성권리 신장과 민주화 앞장서며 평화 전도사로 오롯한 삶 신념 꽃피워

별세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은 여성·민주·평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00년 가까운 고인의 삶은 여성 권리 신장,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구현을 향한 투쟁으로 일관했다. 고인은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의 권익 실현을 위한 싸움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 50년 가까이 민주화 운동의 동반자로 살았으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바친 평화운동가였다. 


여학생들의 리더로서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서다
이희호 여사는 1922년 9월 서울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일찍 개화한 부모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여서 고인은 모태에서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 자랐다.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희호 여사는 1936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했다. 그 시절 이 여사는 반장을 도맡아 하며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보이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다 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 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한 이 여사는 일제 강점 말기의 혼란 속에서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충남 예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 서울로 올라온 고인은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이 여사는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와 함께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남녀평등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이 여사는 여학생들의 리더로서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일에 앞장섰고,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피란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어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여성의 권익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전쟁 중의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이 여사는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초대 회장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권리 주체가 됐다.
이후 이 여사는 오래 꿈꾸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고인은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58년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서른여섯에 귀국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사회학 강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58년 겨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발탁됐다. 이 단체의 총무로 있던 4년 동안 이 여사는 전국의 YWCA 조직을 돌면서 여성 권리 쟁취를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섰다.

김대중과의 결혼,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 삶 시작
독신의 여성운동가 이희호의 삶을 바꾼 것은 1962년 야당 정치인 김대중과의 결혼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 인연을 맺은 김대중은 당시 전처를 비운에 잃고 박정희 군사정변 세력에 탄압당하던 무일푼의 정치 낭인이었다. 집에는 어린 두 아들(홍일·홍업)과 심장병을 앓는 여동생과 어머니가 있었다. 고인은 주위의 집요한 반대를 무릅쓰고 김대중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고인은 훗날 회고했다. 
결혼 뒤에도 고인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계속했다. 그의 투철한 남녀평등관은 정치인 김대중의 여성관을 바꾸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김대중은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결혼 직후 대문 옆에 ‘이희호’·‘김대중’ 문패를 나란히 단 것도 아내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음을 훗날 김대중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혼과 동시에 이 여사의 길고 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닥쳤다.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탄압의 칼날은 유력 야당 정치인 김대중에게 집중됐고, 고인과 고인의 가족, 주변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긴 고난 속에 핀 신념의 꽃
유신체제의 종말 이후에도 이 여사와 그의 가족이 지내야 할 환란의 터널은 끝이 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한편에서는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편과 가족,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때 큰 아들 홍일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가 영구장애를 얻었고 끝내 파킨슨병의 악화로 고인보다 앞서 생을 마쳤다. 남편과 자식을 신군부의 마수에 빼앗긴 이 여사는 가택연금이 풀리기까지 1년 동안 몸이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은 감시와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연옥의 시련 속에서 이 여사의 민주주의 신념은 오히려 커졌다.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 여사는 남편에게 군부세력과 타협하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했을 때 이 여사는 서울시청 앞 노제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남편이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말은 이 여사의 지난 삶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했다. 2009년 9월 고인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동역자이자 동지로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남편이 해오던 일을 이어가는 데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였다. 이여사는 이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방북해 조문했고, 2015년 8월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각계 인사들과 함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녀가 한 말이다.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에 이어 고인의 마지막 10년은 평화운동가의 삶이었고 긴 고난 속에 핀 신념의 꽃과 같았던 97년의 생애였다.              
취재_ 이동현 기자

이동현 기자  jineu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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